추석 연휴 기간, 일본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새로운 총재로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을 선출하면서 일본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일본에서 자민당 총재직은 사실상 일본 총리직과 직결되는 만큼, 다카이치의 당선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모았다. 기존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대형 비자금 스캔들과 고물가 문제 속에 지난해 선거 연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11개월 만에 치러진 이번 선거는, 일본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총재는 대대로 정치를 해온 가문 출신이 아닌 '비세습 정치인'으로 1993년부터 중의원 10선을 지낸 자수성가형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궤를 같이하는 보수 중의 보수로 분류된다. 그녀는 경제와 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아베 전 총리의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밝혀 '여자 아베'라고 불린다. 특히 태평양전쟁 A급 전범 등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꾸준히 참배해 온 극우 성향의 행보는 한일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한국과 일본이 셔틀 외교를 이어오며 관계 회복에 힘쓰고 있었던 만큼, 다카이치 총재의 당선으로 과거사 문제 등을 두고 양국 관계가 다시 부딪힐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다카이치는 자민당 창당 70년 만에 처음으로 탄생한 여성 총재라는 점에서 '유리천장을 깼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정작 성평등 정책 등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어, 그녀의 당선이 여성 정치의 진보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함께 나온다.

다카이치 총재의 등장으로 일본 정치는 더욱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그녀는 이번 선거에서 'Japan is back' 같은 구호를 내세우며 "일본을 한 번 더 세계의 정상으로 만들겠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던졌다. 최근 국수·극우주의 성향의 참정당이 두드러진 지지세를 모으는 등 일본 정치에서 극우의 힘이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카이치가 이들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자민당을 더욱 보수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다카이치가 총리직에 오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자민당이 중·참의원 선거 패배로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총리 선거 절차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야당 의원들의 표가 필요하다. 문제는 지난 26년간 자민당과 연정 관계를 유지해 온 공명당이 연정 탈퇴를 선언했다는 점이다. 공명당은 다카이치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포함한 역사 인식 문제와 정치 자금 스캔들 방지책 마련 등에서 자민당이 진정성 있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총리 선거에서 다카이치에게 투표하지 않고 연정을 끝내겠다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다카이치의 총리 선출은 불확실해졌으며, 그녀가 총리직에 오르더라도 불안정한 정국 운영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당 대표 당선 이후에도 총리 선거 절차와 복잡한 연정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복잡한 정세가 일본을 기다리고 있다.